말구유의 표적



강윤구 목사


누가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보면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것인데 말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를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표적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보여주시는 것엔 항상 메시지가 있다. 표적이 있다. 


문제는 표적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스스로 회개하고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할 수 있느냐이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만났거나 예수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예수라는 인물이 나사렛 동네에 살던 목수 출신의 젊은이인 반면, 어떤 이들에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였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은 출근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씨를 만난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만난 예수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 믿어질 때라야 십자가의 구원의 사건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왜 말구유가 표적일까? 말 그대로 말 밥통인 구유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모아지는 곳이 아니라는 걸 가정해 볼 때 사람들이 당시 기대하던 메시아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달랐다는 걸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이 말은 만약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가 말 구유와 같이 낮고 낮은 곳에 나아가 무릎을 꿇지 못하고 호화롭고 안락한 아방궁 근처에서 메시아를 찾을 경우 결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을 사는 나의 삶의 현장에서 말 구유는 어디일까? 일반인 예수가 아닌 구세주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탄을 그리며 2014년 말 구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해 본다.



2014년 1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