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5

강윤구 목사

 

용두사미. 요즘 내 머리를 맴도는 말이다. 모습을 머리는 용이지만 꼬리는 뱀이라는 뜻인데 시작이 그럴싸하지만 끝이 시원치 않아서 별볼 일 없는 상황을 표현할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아마 어떻게 하면 자꾸 뱀 꼬리처럼 치달아 꽁무니를 내빼는 모양을 용같이 준수한 모습과 기개로 되돌릴까 하는 고민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지난 목요성경공부반에서는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오는 남유다 왕들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읽고 공부하면서 용두사미라는 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지 않았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범죄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도 자기 맘대로 하였고 때로는 바알이나 몰렉 같은 우상을 섬기거나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우기까지 했다. 물론 남 유다는 북왕국과는 달라서 남유다 왕국의 왕들은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왕으로서의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남유다의 왕들은 대체적으로 용두사미와 같았기 때문이다.

껍데기만 남은 예배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었다. 남유다도 결국은 정의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백성, 믿음의 민족이라 자부하던 남유다는 그렇게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렇다. 마찬가지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기도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며 시작한 성도의 삶이나 교회의 모습이라도 있어야 할 믿음의 진정성과 지속성이 사라져버린다면 그저 용두사미의 형세가 되어 그 모양이 말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오늘을 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우리의 얼굴엔 용두사미의 모습이 많은 게 사실이다.

교회에선 끊임 없이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예배가 드려진다. 그 예배 안엔 회개와 찬양과 믿음의 고백으로 가득 차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언제나 중요하다.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용두사미의 형세가 되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무신앙의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폄하하는 이유는 기독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입으로만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두용미의 신앙이 되도록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