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5일
강윤구 목사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인 동시에, 오랜 시간 죽어있던 마른 뼈와 같았던 종교적 가치관들을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성도들, 즉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볼 때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인 이유를 알 수 있다. 바울의 말대로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능력인 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과 패배의 상징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도와 성도가 아닌 사람의 차이는 곧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의 차이로도 볼 수 있다.
나는 고난 주간 부활절을 기다리며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되물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사명을 가진 나는 십자가의 메시지에 충실하게 증거했는가를 말이다. 마음이 떨렸다. 십자가의 메시지를 증거하기는커녕 내 자신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지는 일조차 부담스러워했던 내가 아니던가?
대한성서공회의 총무로 계신 민영진 목사님은 언젠가 “메시지는 마사지가 아니다”라고 한 말씀이 새삼 기억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의 Message가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마음을 위로하게 편하게 해주는 Massage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사지가 되어버린 말씀의 선포는 병은 치료하지 않은 채 강한 모르핀 주사로 고통을 잊게 해주며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목회 초기의 나는 위대한 선지자라도 되는 듯 무조건 성도들의 연약함에 대하여 칼날을 세웠던 적이 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나서 생각해 보니 성도의 상황과 심령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그들에 대한 사랑도 부족했던 것 같다. 선무당이 사람 잡듯이 설교라는 미명하에 성도들의 상처를 헤집어놓았던 시절을 기억하면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한 때는 성도들의 상황에 맞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애를 써보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메시지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십자가가 메시지의 중심이 되지 않은 메시지는 사람의 위로에 불과했다. 사람의 위로가 잠깐의 힘은 될 수 있지만 영원한 위로도 줄 수 없고 무엇보다 그 안에는 생명이 없었다. 십자가가 빠진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자의 견해로 남을 뿐이다.
그 이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그대로 전달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이 신탁을 할 때,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말씀으로 메시지를 시작한다. 자신의 메시지와 해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이 백성들의 요구에 맞춰진 심리적 마사지도 아니고 마취제나 진통제가 아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가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험한 십자가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