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12

강윤구 목사

 

2007년에 Bucket List라는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폐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두 사람이 좌충우돌 하면서 자신들이 하고 싶어했던 일들을 하러 떠나 경험하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 영화 이후 많은 사람들의 삶의 패턴에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계처럼 일하고 열심히 사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삶의 의미와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은 해외의 곳곳을 누비며 여행하는 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는데 돈과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나름 살기 위해 쉼을 위해 마음의 평강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들 생각한다. 이제 사람들에게 돈과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대부분 여행을 가거나 쇼핑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사람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당연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쇼핑이든, 마약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있다.

잘 살아보기 위해 원하는 것을 통해 의미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했던 탕자의 이야기는 버킷 리스트에 집착하는 오늘의 현대인의 얼굴과 너무나 닮았다. 환경은 변했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 사항들을 이루어야 좀 사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은 살기 위한 필연적인 몸부림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다른 해답을 주고 있다.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죽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죽어야 한다고.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어야 한다고 말이다. 세례를 통해서 배우는 삶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죽지 않은 자는 다시 살 방법이 없다. 부활은 죽은 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법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부활은 성경에 쓰여져 있는 말씀일 뿐 자신의 영의 양식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버킷 리스트를 새롭게 고쳐 쓰고 있을 뿐 자신을 부인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우리는 실제는 바뀐 것이 없다. 사람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나 소돔과 고모라의 때) 여전히 버킷 리스트를 들고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러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살기 위해 자신만 살고 만족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어떤 인류도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태어나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탕자는 살려고 나갔고 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하지만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에서 종이 되겠다는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순간 그는 다시 살 수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모든 삶의 조건은 스스로 죽고 자신을 부인했을 때 거저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제 21세기의 탕자라 할 수 있는 우리 자신도 살기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다시 살아나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