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구 목사



며칠 전 아내가 기흉(Pneumothorax)이라는 예상치 못한 질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친절한 간호사들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많아지게 됐는데, 그들 중 한 간호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말인즉슨 화창한 봄날이긴 한데 자신이 일하는 병동에서는 창문을 내다볼 일이 거의 없어서 일을 하다 보면 바깥 세상이 어떠한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창문이 없는 게 아니라 창을 내다 보지 않으며 사는 삶의 방식이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치유된 사람은 보지 못하고 환자들의 환부와 환자의 가족들에게 어려 있는 슬픔만을 보면 살고 있는 보는 방식이 문제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간호사는 밖을 내다보고 하늘의 햇살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자신이 창문 없이 살아온 것을 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창문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간호사를 통해 생각해 보건대, 어쩌면 빛의 문제는 창문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는 하나님이 곧 빛이시라고 말한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경험하는 죄의 실존의 문제가 곧 어두움이라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은 곧 빛을 경험하는 일이라고 은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어둠 속에서 죄에 매인 인생들은 도대체 빛을 경험할 수 없다고 야단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들 말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빛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논리에선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빛 가운데서 살고 있지만 창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모든 문을 틀어막고 빛이 없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그래서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둠의 문제는 창문의 문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창문을 찾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두운 방에 가득 찬 어둠의 그림자가 물러가게 된다. 어둠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요한복음 15)고 했다. 다만 문제는 그 빛이 우리 심령 가운데 비출 수 있도록 창을 내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삶의 짙은 어둠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심령의 창을 내야 할 것이다. 본인 스스로 빛이 되고자 할 것이 아니라 그저 창을 열거나 창을 내기만 하면 된다.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주님의 빛이 삶의 현장에 어린 어둠을 물리치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