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구 목사
터키의 북서쪽 에게해 연안에 드로아(트로이)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그 여정을 되돌려 거꾸로 돌아가려 했을 때 꿈에 한 마케도니아인이 나타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고 마케도니아로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복음의 갈급함과 간절함이 있는 곳에서 열매를 맺는 법이다. 교회의 역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국 선교 역사에도 이 마케도니아인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의 혼란 속에서 명성황후를 지키는데 공을 세웠던 양반이었던 이수정은 그 공으로 고종의 후의를 입고 일본 유학에 올랐고 문물을 가르치던 감리교인 츠다센을 만나 복음을 접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수정은 복음을 통해 거듭난 후 한자성경에 토를 달아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쪽복음을 번역하고 한국 선교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편지를 썼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참된 하느님의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를 파송만 해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편지를 Missionary Review라는 선교 잡지에 소개했고 이수정은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미감리교 해외선교부는 1883년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선교하던 캐클레이를 한국을 위해 보냈고 이후 의료 선교사 알렌, 1885년에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선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에겐 중국과 일본만이 선교의 관심이었기 때문에 만일 이수정의 간곡한 선교 요청의 편지가 없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아마 교회 선교의 역사는 매우 늦게 시작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한국의 국민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의료, 교육 사업 등의 선교 사역이 없었다면 근대 한국의 성장조차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복음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복음의 열정과 소망을 품을 수밖에 없다. 19세기 말 이수정이 한국 선교사의 복음의 문을 여는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었다면, 어번의 마케도니아인은 누구일까?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 중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우는 어번의 마케도니아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우리의 일이다. 어번교회의 일이다. 먼저 예수를 믿은 우리의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