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구 목사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가 회심한 날이 1738년 5월 24일이니까 오늘은 정확히 웨슬리 회심 277주년이 되는 날이다. 감리교회에서는 이날을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로 예배를 드린다. 당시 웨슬리 목사는 거듭나지 못한 채 선교와 목회를 하다가 진이 빠진 상태였다. 그러다 체코의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의 후예인 모라비안교도들의 집회에서 성령체험을 하였고 거듭나게 되었다.
그 이후 영국 성공회의 제도적 신앙에 갇혀 있던 영국사회의 곳곳엔 존 웨슬리 목사의 발길이 닿았다. 그는 새로운 교단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하려 했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성공회 교단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문제는 당시 성공회 헌법 상으로 금지돼있던 옥외 설교를 한 것과 사제로 서품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하지 않은 교구에서 설교를 한 일이었다.
당시 제임스 하비 목사는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성공회는 존 웨슬리 목사로 하여금 다른 교구에서 설교하지 못하게 제지하였다. 하지만 이 때 존 웨슬리 목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 말로 답하였다. 웨슬리의 일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게 다른 사람의 교구에서 전도하지 말라고 합니다만 사실상 이것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 내 교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어디에 속해있든, 나는 내 판단으로 만나고 옳은 길을 결정합니다. 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사역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웨슬리는 성공회 목사로서 복음의 열정을 불사르려고 하였지만 교단이 복음을 제한하자 낡은 부대가 되어버린 성공회와 성공회 법을 버리고 시장과 감옥이나 병원 등 당시 교회들이 선교의 자리로 생각하지 않던 곳으로 찾아가 복음의 씨앗을 심었고 그 복음의 능력으로 인한 성령의 불길이 영국 전역을 밝히게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학원과 병원과 재난의 현장까지 나아가서 선교하게 된 계기는 웨슬리의 결단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웨슬리는 그 바쁜 전도와 선교의 와중에서도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원어로 성서를 연구하는 등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철저하게 경건한 생활을 고수했고 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지지자들, 아니 복음에 빚진 자로서 복음의 사역에 목숨을 걸었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부끄러운 이름을 자랑스런 자신들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더 이상 정해진 교구에 갇혀 선교하지 않고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달려갔다. 사람의 규칙과 사람들의 인기에 기대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 감리교의 거룩한 전통엔 더 이상 정해진 교구가 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크리스찬에게 교구는 어디일까? 적어도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말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신의 삶의 자리를 “나의 교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