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어떻게 깨닫는 것일까? 왜 어떤 성도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어떤 성도는 보고 또 눈 씻고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느냐 아니면 신앙생활을 피곤하고 진이 빠지는 일이라 생각하며 버텨낼 것이냐를 가늠하는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주말 아침 가족기도회를 마치고 채플 2층에 모여 도넛과 커피를 나누었는데, 이 자리에서 한 집사님께서 본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 나누셨다. 난 마음 속으로 무릎을 치며 동의했다. 새벽기도회 본문이었던 말라기서 1장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1장 2-3절에 나오는 내용을 떠올리신 것인데, 이 말씀에서 축복받은 야곱을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관심이 없던 에서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아, 세례 요한, 사도 바울, 베드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더 중요한 인물들을 간과하게 된다. 번영과 축복에만 관심을 갖다 보면,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간과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는 깨달을 수 없고, 죄에 대한 깨달음도, 회개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도 요원한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을 탕자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고난과 박해 속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도 바울처럼 여기기 쉽지만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과거 박해자 사울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선악과를 탐했던 아담, 형제를 미워해서 돌로 쳐죽인 가인은 단지 수 천년 전 살았던 성경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죄 가운데 살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질과 명예에 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자신의 창고를 끝없이 채워가고 있음에도 자신의 영혼의 창고가 텅 비었음을 깨달을 때, 세상의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들로 배를 채워도 영혼의 갈증과 허기를 채울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 때야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