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적인 목적을 잃어버린다는 건 언제나 위험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20여년 전 청소년부 전도사로 사역을 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강원도의 한 산골로 학생부 수련회를 갔는데 그곳은 지금은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운동장도 있고 정원이나 주변 환경 등 모든 게 다 아름다웠으나 뭔가 마음 한 켠에 허전함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공부해야 할 장소가 수련회 장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수련회 장소로 의미 있게 사용되고 있기는 했지만 수련회 일정에 앞서서 그 장소 사용을 위해 사용료를 흥정할 때 그 학교는 더 이상 학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저 과거의 추억을 간직한 채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장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학교에 학생들이 계속 채워졌다면 그 학교는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해서 돈벌이를 하는 상업적인 곳으로 바뀌지 않았을 것이었다.


보통 교회를 비유하여 말할 때 구원의 방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노아가 만든 방주를 상기시켜 그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를 채우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전문 사역자들만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즉 방주에 이미 탄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쏟지 않고 그 일을 할 사람을 따로 고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일까? 그 배에서 재미 있게 행복하게 지내는 일이다. 나쁜 일은 아니지만 방주에 탄 사람들의 본래적인 사명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면 하나님이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제자만을 살려내어 제자들끼리만 행복하게 하시기 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주라고 불리는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곳이기 때문에 영혼을 살리는 일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이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끼리 모여 있으면 폐교가 되어 상업적 목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수단이 된 건물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채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를 키워서 재정을 늘리고 좋은 프로그램을 돌리고 큰 건물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다. 방주로서의 교회는 영적으로 볼 때 물에 빠진 영혼을 살려내는 일을 해야 살아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이 일에 관심이 없다면 더 이상 성도가 아니다. 그들은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일 뿐이다.


어번 교회의 지체된 나 스스로와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의 교회들에게 묻고 싶다. 교회의 지체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구원의 방주를 채워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데에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안녕과 복 받는 일에만 관심 있는 기복적인 종교인이 되어버렸는가? 혹시라도 우리 교회가 폐교되어 상업화된 건물만큼이나 퇴색되고 목적을 잃은 공동체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