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마 메니지먼트
2015년 11월 1일
이 세상에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상처에는 몸에 난 상처냐 마음에 난 상처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상처의 경중엔 객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 느끼고 반응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그 상처에
반응하는 그 사람의 태도가 그 상처 이후의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잘못으로
넘어진 사건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지혜를 배워서 쉽게 넘어지지 않는 리더가 되지만 어떤 이는 넘어질 당시 도와주지 않은 이웃을 탓하며 유지해 오던
좋은 관계들마저 깨어지고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상처 또는 고난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목회를 하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 다양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저마다 특별한 상처와 아픔을 견뎌내는 성도들을 보게 되고 그들의 상처가 개인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안타깝지만 그냥 하나의
상처가 잘 아물고 굳은 살이 생겨서 더 건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트로마로 남아 과거에 경험했던 상처가 오늘과
내일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도 종종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새벽기도를 하며 묵상을 하던 중 그 동안 주의 깊게 보지 못하던 한 사람의 상처와
트로마를 보게 되었다. 바로 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처와 트로마였다. 남의 눈에 있던 티만 열심히 들여다보던 나는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성도들이 감정의 기복을 보이거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을 볼라치면 성서적인 해답을 찾아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를 놓고 기도하던 나였지만 정작 내 자신이 가진 트로마의 실체는
깊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부끄러웠다.
난 나름 어려운 일들을 잘 견뎌낸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먹고 사는 일의 어려움들은 실제론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세 번의 개척목회를 하신 아버지의 사역 은 고난의 훈련장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목회자의 아들(PK)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압박감과 행동의 제약들은 아직도 어렵기는 하지만 그만큼 익숙해진
지도 오래다. 다만 특정한 상황과 반복적으로 마주 대하다 보면 나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트로마가 되어 버린 그 상처의 정황은 바로 “불평”이다.
난 너무 쉽게 불평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가 감당해야 하는 모든 일중에 가장 힘들다. 불평하는 말에 예수님처럼 온유하게 대하는 일이 산을 옮기는 일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다. 얼핏
보면 세상을 사는 어느 누가 불평하는 걸 좋아하겠냐고 하겠지만 나에겐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목회 현장에서 수도 없는 불평과 불만의 포화를 맞고 만신창이가 된 부모님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하시며 외롭게 버텨내시던 모습을 평생 지켜봐 온 나로서는 누군가가 쉽게 습관적으로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이제야 아물려고 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부모님이 참아오신 38년짜리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고통으로 이내 감정이입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이 트로마는 피할 무엇이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이 똑바로 응시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헨리 나우엔의
말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목회자이기에
상처 자체는 피할 수 는 없겠으나 그 상처들이 트로마로 남지 않고 이겨낸 상처, 새 살이 돋고 굳은살이 박힌
회복된 몸과 영을 가진 치유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초신자나 모두 상처와 트로마 앞에 연약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성도에게나 목회자에게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고 기도의 협력자와 돌봄이 필요한 것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트로마와 상처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도 이웃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서로의 상처가 트로마가 되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며 사랑하며 돕고 섬겨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서적인 치료와 메니지먼트가 필요하다. 바로 십자가 정신이다.
상처와 고통을 버텨내시지 않고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 결국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상처가 트로마가 되어버렸다면 그 트로마가 생기는 그 자리에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 거듭난 인생,
새로운 생명은 결코 상처와 고난을 참아내서 얻는 훈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고백하는 성도가 죽어 부활하여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