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익숙해 하고 있는 것들, 우리 주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이 복제품이다. 규격에 맞게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이거나 학교와 사회 속에서 그 시대를 지탱하는 정신과 문화로 주입식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세우신 사람들의 상당수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풍조와 문화와 종교로 획일화되고 퇴색된 사람들로 바뀌어 버렸다. 교회는 큰 건물을 짓고 교회의 선교와 교육 사역 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종교기관이 되기 위해 성장해 가는 단체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규격화된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찍어서 만들어낸 것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고 이제 그건 삶의 당연한 이치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생명체의 복제까지 시도하는 세상이 되었다. 교회도 제도화되고 멋져 보이는 특정한 이미지의 교회를 향해 가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 되기보다 유명한 신앙인이나 정치인과 똑같아지려고 애를 쓰고 있다. 링컨이 되려 하거나 스티브 잡스를 꿈꾸고 신앙인들은 바울이 되려하거나 하용조 목사가 되려 애쓴다.
그러나 복음은 복제품이 아니며 우리 인간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에 따라 창조된 피조물은 그 쓰임새와 계획에 따라 자신의 달란트에 따라 쓰여져야 한다. 세상엔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같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그 자체로 완전한 작품이다. 그 쓰임새를 위한 때와 장소 그리고 목적 등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만 한다면 더 이상 완전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의 지체로 다른 모습과 성품으로 지음 받았다.
언젠가 NC State에서 농림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한 한국인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단맛이 강한 부사 사과를 선호하기 시작하자 한국에 있던 그 다양한 종류의 사과들이 그 가치를 잃어서 홍옥이나 국광 같은 다른 풍미를 가진 사과들이 사라져 버리면서 다양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연애인 얼굴이라면 그 얼굴은 아름답고 부를 수 있을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로 파송된다면 그 교회은 건강한 것일까?
우리는 다른 모양과 성품만큼이나 다양한 달란트와 은사를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쓰임새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매뉴얼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 농사를 짓는데 사용하도록 만든 경운기를 경주용 차로 쓰는 일이 우스운 것처럼 하나님이 온전하게 만드신 나를 세상의 기대에 맞추려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다만 하나님이 특별히 만드신 그 목적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일이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창조된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등불에 기름을 채우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