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소일 장로님의 1주기 추도예배를 마치고

 

4/17/2016

강윤구 목사


고 박소일 장로님께서 소천하신 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고 박소일 장로님의 1주기 추도예배를 마치고 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가정, 교회, 그리고 나 자신의 인생, 신앙생활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아…….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는 일이 이렇게 거룩한 일이었던가? 가까운 가족 중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돌이켜 보는 일이랴?

고 박소일 장로님은 한 교회의 장로였고, 한 여인의 남편이었던 분이다. 뿐만 아니라 두 자녀의 아버지였고, 두 손자 소년의 외할아버지였던 분이었고 나에겐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고이 길러주신 장인어른이시기도 했다. 외적으로 보자면 키도 크시고 인물도 훤칠하신 분이시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을 정성껏 챙기시는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보여지는 풍채로 보자면 그분은 은퇴한 대학교수님이나 대기업 총수처럼 보이셨는데 시대를 잘 만나셨었다면 모 대학 역사학 교수로 은퇴하셨을 것이라 생각된다. 역사를 좋아하셔서 그 먼 옛날 고등학교 때 공부한 한국과 세계 역사를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70 중반에조차 줄줄 꿰고 계시던 분이셨으니 말이다. 아마 일찍 북에서 여의셨던 만석꾼 부모가 한국 전쟁의 비극 속에 유명을 달리하지 않으셨다면 당연히 그러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에게 슬픈 가족사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믿으며 살아온 그 분의 인생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은 이후 평생을 기도하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이제서야 말이지만 고 박소일장로님은 노인들은 잠이 없다는 통념과 달리 초저녁 잠도, 새벽 잠도 많으셨던 아주 건강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매일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일이 그리 쉽지 않으셨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 새벽재단에 기도의 파수꾼으로 앉아 기동의 등불 켜는 일을 통해 가정과 교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을 감당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전쟁 중 남쪽으로 피난 와서 홀로 견뎌온 외로운 생활은 마치 요셉이 견뎌낸 시간과 비슷하다. 외롭고 비극적인 타향살이가 단순히 아픔과 외로움만 가득했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 속에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던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믿음으로만 달려온 인생의 모습을 보면 마치 아브라함과 같고 가족사의 슬픔과 견디어낸 외로움과 기도생활을 보자면 요셉과 닮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하는 남자. 기도로 섬겼고, 기도로 할 말을 했던 말 없던 아버지, 남편, 그리고 장로, 고 박소일 장로님 그 분이 그립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과 어번교회에 고 박소일 장로님을 닮은 또 다른 기도의 사람들이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난 매일 새벽, 그분이 앉았던 기도의 자리를 바라볼 때면 기도의 사람 고 박소일 장로님이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