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소망이 있을까? 지난 주간은 일부 교우와 나에게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한 성도도 있었고 부모의 지병이 위중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가정도 몇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약함과 고통에 신음하는 양을 안고도 스스로 고쳐내지 못하는 목자의 심정이 그럴까? 목회자로서 돌보는 성도들의 심적인 고통과 스트레스를 지켜보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더 인정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 연약함은 보고 만질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넘어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용기와 소망을 주는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이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연약함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주는 도우미 역할을 한다. 연약함을 경험하는 일이 유쾌한 경험은 아닐 찌라도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일은 언제나 유익한 법이다.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해주고 피조물인 우리의 한계를 보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회는 창조주시요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해주고 그 분을 의지하게 해준다.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그 동안 망각했던 아버지를 떠올린 탕자의 모습을 그려보면 그가 경험했을 좌절과 허탄함과 슬픔은 탕자의 개인적 고통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항상 사랑과 은혜로 베풀던 아버지께 나아가는 계기로 승화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준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는 욥이 겪는 극단의 고난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욥기는 욥의 고난 경험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을 보여준다. 욥은 욥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인 것이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은 욥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욥을 위로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욥기는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의미를 깨닫기엔 너무 작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오히려 고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고난과 연약함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해주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아처럼 혼자 애쓰다가 결국 완전히 길을 잃었던 인간들을 찾아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과 그가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는 나 혼자 고난 당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고아 같이 살던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순간 잃어버렸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죄 짐을 지고 나의 아픔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고난 앞에서, 연약함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주신 성도를 위해 예비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얄팍한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 그리고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만 그저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