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216/칼럼
교회 채플 옆에는 새하얀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아침 안개를 머금은 녹색의 싱그러움
위에 아예 쏟아져 내렸다. 때가 되고 무르익으면 꽃은 피는 법이라지만 꽃은 언제나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난 어째서 눈이 시도록 아름답게 핀 이 꽃과 또 그 꽃을 피워낸 기특한 그 나무를 보지
못한 것일까? 사람은 모두 눈을 가지고 있지만 무언가를 보는 눈은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말 가족기도회를 마치고 채플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흐드러지게 핀 수국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아침만해도 내 눈에 띄지 않던 꽃들이었는데 왜 갑자기 이 꽃들이 눈에 보일까 궁금한 맘이 들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며칠 전 성경학교 교사기도회 모임에 참석하러 채플로 향하던 중 수국 꽃을 한아름 따고 있던 한 사람을 보았었다. 그러니까 채플 건물 가에서 꽃을 따던 사람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그 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보고자 하는 것들을 보면서 살아왔고 그래서 내 눈엔 수국 꽃이 쉽게
들어올 수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 꽃을 보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서 나도 그 꽃을 보게 된 것이다. 인생이나 신앙생활에서나 항상 앞서 간 사람의 몫이 중요한 까닭이다. 복음을
알고 예수를 만난 사람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에게 마치 먼저 꽃을 발견해서 그 꽃을 한아름 따 안고 있던 사람과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로 하여금 예수를 스스로 보게 해주고, 또한 그들을 예수의 제자로 삼는 사람이다. 그래서 제자에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주님이 이미 베푸신 은혜를 발견하는 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당연 그 은혜를 앞 서 누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마도 우리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참된 인생의 꽃을 바라볼 수 없는 만큼, 그
시선은 자신의 바람과 꿈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꽃을 본 사람, 복음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그들 주위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보는 눈이 없던 그들의 시선조차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게 될 날이 올 수 있으리라. 믿음의 눈이 생긴 이들에겐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보고 먼저 들은 자, 먼저 믿는 자의 눈과 귀야말로 복음 전파의 열쇠이고 보배라 함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