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916/칼럼
1990년대 초 군에 있을
때 겪은 일이다. 동계전투단 훈련 후 자대로 복귀 행군을 할 때였다.
칠흑같이 어둔 밤에 가파른 산길을 타고 올라 1200고지에 있는 자대에 복귀해야 했는데
우리 소대는 한참을 헤매느라 큰 고생을 했었다. 당시 신임소대장은 지도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경험이
일천했고 지도를 잘못 읽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는 확실했다. 어두운
상황이나 길의 가파름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도가 문제였던 것도 아니다. 다만 지도를 가지고 인도하던 사람의 문제였던 것이다.
미국에 처음 유학 왔을 당시의 일이다. 16년 전 그 때엔 네비게이션이 드물었고 그 시절
이 넓은 땅 미국의 곳곳을 찾아 다니는 일은 전적으로 지도를 읽는 일이었고 길가는 행인에게 길을 묻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네비게이션이라는 기계 하나만을 믿고 전국을 누비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길 찾는 일은 이제 답을 찾은 듯 보인다. 하지만 가끔 네비게이션에 업데이트 되지 않은 곳을 갈라치면
길을 찾다가 낭패를 경험하기 일쑤다. 길잡이가 되는 좀 더 확실한 무엇인가가 생겼지만 여전히 완전한
답이 아닌 것이다.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일에 있어서 만큼은 배우자나 부모나
목회자의 개입을 기대하지도, 허락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자료나 정보가 많기 때문일까? 자신의 경험에 대한 확신 때문일까? 아니면 남에게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일까? 어던 이유로든
혼자서 길을 헤쳐나가고 있다. 예수를 믿는 일에서조차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일에서조차 그렇다. 즉 예수를 따라가는 일에서 예수는 명목상 길잡이이지만 실제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온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날의 삶의 현장에 오신 분, 죄인 된 인간의 삶 가운데서 구원의 모범이 되신 그 분을 배신한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좇겠다고 고백해놓고도 실제에서는 달랐다는 말이다. 이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삶이라니…….
잠시 걸어온 지난 날의 신앙과 인생의 내막을 살펴 보니 우리의 신앙은 이름만 남아 있을 때가 많고 껍데기만 있을 뿐 열매가 없을
때가 많았다. 참 길잡이신 주님을 옆에 두고 걱정만 백배 하는 우리는 여전히 방황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신앙 고백은 고백일 뿐이다. 정말로
주님을 길잡이로 믿고 따라가는 일은 여전히 숙제로 남은 것이다. 부디 예수를 주님으로 인생의 길잡이로
고백하는 나와 우리 어번교회 교우들이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고 순종하여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주여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