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916/칼럼
40대 중반이 되면서 내 자신이 유연성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밤에 자고 아침에 깨는 일이나 운동 후 몸을 회복하는 일은 20대 때나 30대 때의 상황과는 확연히 달라진 게 분명하다. 몸의 유연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건 자연적인
현상이니 뭐 그리 큰 깨달음도 놀라움도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고가 유연해질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오히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생각하고 말하고 무엇인가 결정하는 일에서도 유연함을 잃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한 인간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유연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의 삶의 자리가 항상 사람들을 대하는 목회 현장이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돈이나, 직장이나
어떤 사건보다 한 사람의 인생내지는 한 가정의 성장과 성숙에 대해 더 많이 보고 생각하고 기도할 기회가 많다. 그 기회들은 ‘한 사람의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그 삶의 생각이 보다 유연하고 남들과도 더 쉽게
소통한다”라는 통념이 진리가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오히려 반대로 매우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워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연륜이 쌓이고 경험이 많아지면서 알곡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겸손해 지는 지혜의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모습인 것 같다.
간단히 말해서 특별한 계기의 깨달음이나 노력이 없다면 사람은 점차 몸과 맘의 유연성을 잃고 매우
이기적이고 고집스런 사람이 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말하는 1만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지속적으로 1만 시간이 넘게 같은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에서 탁월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데, 이 경지에서 보면 이기적인 욕심과 독단적인 고집으로 살아온 인생의 연월이 길어질수록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완고함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개인의 고집스러움을 자신의 문제로 내버려두어야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목사든
평신도든) 자신의 완고함을 믿음의 굳건함과 분별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강퍅하고 완고한 맘으로 살아가면서도 정작 스스로 믿음의 반석 위에 서있다고 착각하는 까닭에 자신과 다른 삶과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실수를 쉬이 저지르고 가정과 교회를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반면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선 사람은 결코 완고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에 그분의 판단에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내려놓고 순종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사람이다. 믿음의 굳건함은 결코 자신의 신앙관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믿음의 확고함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라면 언제라도 변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결코 완고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다. 믿음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대한 굳건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