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여름 군에 복무할 때의 일이다. 이웃 사단에서 복무하던 감신대 동기는 사단교회 학생들을 데리고 깊은 산의 계곡으로 수련회를 가서 목숨을 잃었다. 제대를 앞두고 있었는데 들어가지 말라 했던 폭포가 있는 못에 빠져 허우적대던 중학생들 몇 명을 살리려고 물에 뛰어들어 아이들을 살린 후 정작 자신은 지쳐 못에서 나오지 못했다. 폭포 밑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 시신은 몇 달이 지나서야 찾을 수 있었단다. 휴가 때 만나기로 했던 말년병장 내 친구는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중학생 몇 명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며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짧은 삶을 불꽃처럼 불살랐다.
자신을 낮추는 일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귀하고 위대한 일들은 통상 낮추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특히나 사랑하는 일이나 생명을 다루는 일들이 그렇다. 예컨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그렇고, 목회하는 일이 그렇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그렇다. 위대한 일들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부터 시작할 뿐 아니라 그 위대함 자체가 낮추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보통 어머니의 사랑을 위대하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은 몸을 굽히고 냄새 나는 기저귀를 갈면서 자신의 손에 변을 묻힌다는 걸 의미한다. 어머니의 능력은 내려놓는 일이고 낮추는 일이고 손해 보는 일이다. 기꺼이 낮춘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의 일을 더 사랑하고 자신의 위치에 남아 있고자 하는 어머니는 육신의 어머니일 수는 있지만 위대한 사랑을 품은 어머니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교사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잊어버리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과 학문의 수준에서 무식하고 무지한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아이가 보는 수준에서 문제를 보아야 하고 귀찮은 수고를 되풀이해줘야 하기도 한다. 교사가 낮춰주는 만큼 학생이 성장할 수 있는 탓에 사실상 교사의 하는 일의 대부분은 자신의 수준에서 아이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랴. 인간이 사랑하며 살리는 일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도 위대한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일의 위대함은 말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어리석어 보일 뿐이다. 하나님은 죄인인 피조물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높은 보좌에서 내려오셨다. 그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 한 마디,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그거 거룩하고 위대한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위해 그렇게 자신을 낮추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의 능력은 십자가를 지는 일일 수밖에 없다. 머리로 입으로 그리고 계획으로만 했던 위대한 사랑의 일을 이젠 몸을 낮추어 해야겠다. 내 몸을 불사르는 목회, 그것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능력임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