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살만한가? 이 질문은 많은 사상가나 우리의 어머니나 할아버지 같은 인생의 선배들이 던졌던 질문이기 때문에 어쩌면 인간이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 중에 가장 오래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겪고 있는 힘겨운 고난과 씨름하다 보면 삶의 의미 자체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그 얘기는 뭇사람들 대부분이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아서 살아야 할 이유를 물어야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심오한 질문은 우리 인생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적 어려움의 그늘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해준다.


고민을 많이 한다고 답을 아는 게 아니고, 답을 머리로 안다고 인생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인생은 살만한가 하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을 하든 아니오 라고 대답을 하든 인생의 현실에선 자신이 한 그 대답이 삶의 열매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내가 1+1=4라고 우긴다고 해서 답이 4가 될 수도 없고 답이 2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에겐 4라고 속여 말한다면 안다는 것만으로는 그가 지혜롭다고 말할 수 없다. 2를 아는 지식과 함께 그 지식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논리들(실제로는 일리들)과 상관 없이 엄연히 하나님의 진리는 존재한다. 인생은 당연히 살만하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신 세상과 인간의 삶을 가지고 그 어떤 고민을 하든 인생은 당연히 살만한 것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섭리와 계획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깨달음은 곧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을 통해 일어나고 하나님을 만나 깨달은 사람의 눈에서는 우리의 삶의 시간과 공간이 감사의 조건으로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성도는 인생의 희로애락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감사의 조건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눈으로 인생을 보기 때문에 성도다운 성도는 인생이 살만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일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심오한 고민과 씨름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죄인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자는 그저 죄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인생은 살만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든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동행하심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