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꽃자리는 어디?
091116/칼럼
얼마 전 읽은 짧은 시 한편(“꽃자리”)이 머릿속에 맴돈다. 오늘의 시간,
현재의 삶의 자리에 대해 묵상하게 만든다. 우리의 인생에 꽃자리라는 게 있을까?
만일 그런 게 있다면 그 꽃자리는 서로 경쟁하여 소수의 사람만 차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겐 전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리고 그들에게 꽃자리란 성공, 출세,
명예, 돈 등을 뜻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름도 아름다운 꽃자리는 아무나 차지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어서 불특정 다수와 끊임 없이 경쟁하여 성취해야 하는 무엇으로 여기는 까닭에 오히려
꽃자리는 피비린내 나는 경쟁과 전투의 자리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작고한 구상 시인이 쓴 “꽃자리”라는 시의 제목엔 각주가 달려 있는데 이걸 보면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사람을 만났을 때의 축언을 조금 풀이하여 시로서 써 보았음”이라고 되어 있다.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의 우울한 시대상황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항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고 인사를 건낸 공초 오상순 선생의 말에 감명을 받아 “꽃자리”라는 시어로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삶의 현장을 표현해낸 것이다. 그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구상 시인의 각주가 말에 속에서 그의 인생관과 더불어 참된 신앙인의 가치관을 발견하며 놀라게 된다. 가시방석으로 여기던 자리를 어떻게 꽃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긍정하지 않고는 기쁨과 감사로 화답할 수 없기에, 그의
시 속에서 자신이 앉은 자리를 꽃자리로 고백하는 구상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사도
바울이 비천한 데나 부유한 데나 처할 줄 알았다는 고백과 일맥상통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막연히 언젠가 꽃자리에 앉을 날을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자리를 가시방석으로
간주하기 십상이다. 이제 그 언젠가를 꿈꾸며 오늘을
낭비하는 인생으로 살지 않고, 오늘의 시간, 지금의 자리에 감사할 뿐
아니라 이 자리를 “꽃자리”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을 갖는 신앙인으로
설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꽃자리는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