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사람을 향한 기다림도 있지만 때론 그 사람의 손에 들려진 것을 기다리는 기다림도 있다. 어렸을 적 나의 기다림은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사업을 그만두신 후 인천 신흥동 사거리에 개척하셨던 아버지는 몇 년 후 앞으로 아파트 촌으로 개발 예정이던 벌판 위에 천막 예배당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셨고, 기도와 심방을 위해 항상 나가계시던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도와 심방을 마치시고 귀가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 익숙했다.
그런데 그 익숙한 기다림조차 설레게 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아버지가 당시 독일제과점을 운영하시던 성도님 댁과 갈비 집을 운영하시던 성도님 댁을 심방하시는 날엔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짜장면과 탕수육은 일년에 한 두 번이나 먹을 수 있던 시절에 갈비 집이나 제과점이라는 곳은 가난한 목회자의 초등학생 자녀였던 나에게 칠성급 호텔이나 다름 없었다. 젊은이들의 미팅 장소로 여겨지던 제과점에서 만든 빵들이나 숯불로 구운 소갈비의 풍미는 아직도 잊을 수 없을 정도이니 그 시절 그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던 초등학교3학년의 나에겐 아버지가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때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나 설레는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빵과 갈비를 먹으며 기뻐하던 모습을. 그리고 이제서야 보인다. 그날 따라 속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대접 받은 식사의 대부분을 남겨 싸오셨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자녀를 위해 모든 걸 주시던 두 분의 짠한 사랑이. 그 시절 아버지를 기다리던 내 나이가 아들 준모의 지금 나이 정도였을 것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 나이의 나에겐 아버지 손에 들려진 것만 기다림의 대상이었던 게 당연했을 테지만, 이제 내가 나이를 먹어가며 지난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자니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손에 들려진 것들만 기다렸던 게 너무 후회가 된다. 당시 아들 딸 챙기시던 부모님을 맛있는 음식보다 더 좋아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성경을 보니 메시아를 기다린다던 철없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다.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기다림만큼이나 그들은 이기적이었나 보다. 그들은 왕보다 더 멋지고 화려한 메시아를 기다렸고 하나님이 보내실 엄청난 선물꾸러미만 기다렸다, 그래서 빈손처럼 보이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을 만나자 모두 실망하고 말았다. 기다리지 않았던 게 아니라 기다림의 대상에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오신 나사렛 예수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하자 그를 죄인 취급했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인 그 십자가는 2000년이 훌쩍 지난 우리들조차 믿음이 없이는 볼 수 없는 선물이다.
대강절을 지나며 하나님을 떠올리는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집으로 퇴근해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다. 이제 그 당시의 기다림에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고 안아드리고 싶다. 이제 예수님의 선물꾸러미보다 예수님을 더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