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연보(日 捐補)의 기적
091816/칼럼
한국교회 선교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한국교회 안에서 자생한 특별한 헌신의 역사가 있다. 물질이 없던 성도들이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고 실천한
사건인데 이것을 ‘날 연보(日 捐補)’라고 불렀다. 그리고 소위 날 연보라는 것이 없었다면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평양대부흥운동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은 한국교회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흥운동이 회개하고 말씀으로 은혜 받는 일과 관련이
되어있었다면 날 연보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날 연보가 없이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요원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인 나에게도 다소 생소한 이 날 연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 요즘엔 잘 사용하지 않지만 연보라는 말은 헌금을 부르는 다른 말인데
날 연보라 하면 농한기 같이 시간이 많은 때에 자신의 하루 하루의 시간을 하나님께 봉헌하여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 민족의 역사 중 가장 경제사회적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던 1900년대 초엔 조선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그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일부 부흥사들이 물질 대신 하나님께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그 부름에 한국교회의 초기 성도들은 능동적으로 응답했다. 경제적 빈곤함 속에서도 자신의 날들, 시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서 산골 오지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한국의 두메산골까지 교회가 세워지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한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복된 소식은 전달되고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혜 받은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널리 전하라는 예수님이 주신 지상 명령에 결코 합하는 일도 아니거니와
그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값진 것을 찾는 것도 힘든 일이다. 예수를 믿는 일은 결코 머리나 무릎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헌신된 나의 발걸음으로도 해야 한다.
교회사엔 은혜로운 사건과 기적 속에 세워진 교회들이 너무나 많았다. 멋진 건물을 가진 교회, 재정적으로
넉넉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계층이 많은 교회 등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세워진 교회와 성도들만을 위한
교회는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이요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복음의 증거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교회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오늘의 시대는 헌신도 감사도 모두 물질로 계산되는 자본주의 시대이다 보니 어떤 이들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물질을 하나님께 쉬이 드리지 못하기도 하고, 반대로 드리고 싶어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드리지 못해 맘을 끓이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초대교회의 성장과 선교 역사 속에서 큰 역할을 했던 날 연보를 기억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내가 인터넷과 TV로 의미 없이 보내는 그 시간들은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고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뿐 아니라 날 연보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어번교회가 된다면 과거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가 어번에서도 다시 일어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