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따를 것인가?
010816/칼럼
복음서를 보면 특정 인물들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기사와 이적을 통해 병고침을 받거나 위로를 얻기도 했고, 때론 말씀에
감동을 받아 죄를 회개한 후 용서함을 받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세주로 영접한
후 그들의 삶에 전인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도 깨닫지 못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보편적인 변화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예컨대, 베드로 사도는 물고기를
잡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고, 민중의 고혈을 빨던 세금관원 삭개오는 백성들에게서 자신이 빼앗은
것을 모두 되돌려주었다. 한 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녔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건 선교사 바울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이 사도가 되거나 선교사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인들의
지방의 한 묘지 근처에서 만난 군대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참 흥미롭다. 귀신 들렸다 나음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떠나시려고 할 때 자신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다가 예수님께 거절을 당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을 사도로서 좇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어떻게 그에게 그 큰 일을 행하셨는지 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후 데가볼리 지역엔 그의 입을 통해 그 소식이 전해지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라는 건 정해진 단 하나의 양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 베드로처럼 가정을 떠나거나, 바울처럼
자신의 커리어와 명성을 버리고 복음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인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처럼 우리에게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곳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은사와 형편에 맞게 사용하신다.
말하자면 따름이란 나 자신의 계획과 결단에 따른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이 일을 분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결단하고 노력하고 애썼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님은 나 자신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아시는 분이시고 그분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계획은 오랫동안 고민하며 세워온 나의 진지한 계획보다 더 복되고 귀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제 따름은 나의 생각, 계산, 고민에서 시작될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순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새해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라야 할까?
아마도 주님의 인도하심과 부름에 순종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엎드려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