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011516/칼럼

 

거울을 한참 쳐다 보았다. 참 특별한 물건이란 생각이 든다. 그 용도와 쓰임새의 이중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울은 본시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한 것이라지만 실생활에선 남을 보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의 잘못되고 흐트러진 모습을 찾아내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자기자신의 약점을 가리고 포장하여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장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자신을 보기도 하지만 남을 엿보는 도구도 된다.  

그런데 집에서 흔히 쓰는 거울 뿐 아니라 말씀의 거울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 중엔 성도는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항상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분명 맞는 말임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이론과 실제가 항상 다르듯이 말씀의 거울은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는 성도들 앞에 말씀의 거울을 디밀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보게 하려 애쓰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의 죄를 쳐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씁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생각을 하면 그저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반대로 말씀을 읽거나 듣는 성도들도 자신이 아닌 남을 향한 말씀으로 생각하여 자신에게 비추인 말씀의 빛을 반사시켜 남에게 비추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가 놓쳐버린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내 자신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가꾸어갈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이솝 우화엔 욕심쟁이 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던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입에 큰 고기덩어리를 문채 다리 아래 시내를 바라보다가 고기를 물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그 개의 고기를 빼앗기 위해 욕심을 부려 짖어대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이 물고 있던 고기를 시냇물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뭐 그런 얘기다.

물가에 비추인 고기를 물고 있는 개를 보면서 그 개는 다른 개를 보았고 질투했고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개의 눈에 비춰진 개는 자신의 욕심이 투사된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욕심 많은 개는 얄밉게도 자기보다 더 큰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는 개만을 본 것이다. 그 결과 오히려 불행해졌고 인상을 쓰며 짖어대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면 그 결과는 이렇게 불행한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은 성경 안에만 있을까? 아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도 존재한다. 최순실의 추악한 모습을 잘 들여다 보면 우리 자신의 사악하고 욕심 많은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후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눈이 열려 간음한 여인의 음란함 속에서 자신이 숨겨놓은 음란함과 죄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성경 뿐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거울일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도 바라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거울이 자신을 깨끗하고 온전하게 가꾸는 도구가 되어야 하듯, 말씀의 거울을 보든 다른 사람을 보든 그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새해가 되어야 하겠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올 한 해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다 아름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 19)